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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조병화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시로 쓰는 자서전...
글쓴이 관리인 등록일 2021-01-19 오전 8:31:08 조회수 26



금년은 조병화(24세. 양절공파)시인이 탄생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래서 이번 주 부터는 조병화 시인을 좀 더 알기위해 시인이 살아계셨을 때 쓰신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자란다』에서 글을 옮기기로 하였습니다.아무쪼록 시인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병화 문학관>

1 출발.
 
    경기 남부, 작은 농촌 마을에
    꿈이 많은 소년이 있었다.
 
  자라나면서 소년은 
  낮엔 산이나, 들이나, 개울이나,
  혼자 다니면서 들짐승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산새들의 등지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상스러운 꽃들을 모으기도 하고,
   송사리, 가재, 산새 새끼들을 잡기도 하고,
   어머님하고 산나물을 하러 높은 산에도 오르고,
   흙처럼, 들풀처럼, 바람에 날리기도 하면서
   
밤엔 반딧불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에 누워
  먼 하늘에 떠도는 무수한 별들을 헤어보기도 하고,
  쏜살샅이 떨어지는 별똥을 쫓아가기도 했다.

   학교에 가는 길 십리,
  학교에서 오는 길 십리,
   가닥 비가 와서 개울이 넘친 날엔
    그냥 되돌아오다가 방앗간에 들러서
    아이들하고 딱지를 치기도 하고,
   도시락을 다 먹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활을 쏘기도 하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쥐불을 놓고 윗마을, 아랫마을과 
  패싸움도 하고, 뒷동산에 올라서
    정월 대보름 달맞이도 하고,
  남사당, 두레꾼들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나는 1921년 5월 2일에,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蘭室里)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음력으로는 3월 25일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축시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님 말씀이 태몽에 꽃을 많이 안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은 시골 한학자, 호를 난유(蘭囿)라고 했습니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소농이었습니다. 마을의 중심되시는 분이었습니다.  난실리는 본래 한양 조씨(趙氏)의 마을이었습니다. 전에는, 그러니까 내가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을 때엔 사람들이 얼마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확하게 39호가 살고 있는 농촌입니다. 6·25 동란 이후엔 여러 성씨(姓氏)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농촌 마을에서 나는 여덟 살 되던 이른 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나는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봄, 그러니까 4월에 용인군에 있는 송전공립보통하교(松田公立普通學校)에 들어갔습니다.
 용인군과 안성군의 군계에 우리 난실리는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용인군 이동면 송전리까지는 걸어서 10리가 되는 거리였습니다.  이곳을 매일 나는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가는 길에 개울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도 있었습니다. 그 개울 이름이 송전천(松田川)이었습니다. 장마의 계절, 비가 많이 내려서 개울이 넘치고, 다리가 끊어지면 그곳까지 갔다간 도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날도 출석으로 해 주었습니다. 공동묘지 앞을 지나가는 것이 무서워서, 사람이 오는 걸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자동차는 가끔 이곳 송전에서 보곤 했습니다. 아주 드물게 이곳까지는 자동차가 경부선 오산(烏山)에서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 운전수가 나에겐 참으로 멋있게 보이곤 했습니다.
 나의 난실에선 안성장 30리, 오산장 40리, 용인장 30리, 그 오일장을 걸어 다니면서 생활  필수품들을 교환하곤 했습니다.
 걸어서 다녔지만, 마차가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나는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시로 쓰는 자서전--세월은 자란다』 1995년 6월 15일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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