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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 정종대왕이 탄복한 忠孝兩全의 가천재(6세, 휘 師)공
글쓴이 관리인 등록일 2020-04-14 오후 2:15:24 조회수 68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백세사표(百世師表)>
가천재공은 시조 중서공[中書公 휘, 之壽]의 5世孫으로 양렬공〔襄烈公, 5세 휘 인벽(仁璧)〕의 넷째 아드님이다. 양렬공은 처남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수차례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굳게 지켜 출사를 피하였다. 가천재공은 부친 양렬공을 모시고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갔다. 가천재공의 효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가천재공의 사적은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에 약간 실려 있는 것이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천재 선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해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 때의 사람이었다. 당시 시대상황은 커다란 두 세력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高麗 遺臣(정몽주를 중심) 세력과 신흥세력(정도전을 중심)의 필연적인 충돌, 그리고 고려 말 창궐했던 왜구 토벌을 통해 성장한 신흥무장 세력인 이성계가 신흥사대부층과 손을 잡으면서 역성 혁명을 이루어 가는 조선 건국 과정을 가천재공 선조 역시 비껴갈 수는 없었다.
공은 권문세족의 일원으로서 기득권이 있었으되 부친인 양렬공처럼 그것을 유지하려 연연하지 않았다. 새 왕조 등장에 따른 새로운 기회를 맞았지만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려고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충효와 도의 그리고 지조의 사표가 아닐 수 없다.
공은 포은 정몽주를 추앙하고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등과 같이 ‘3은’의 충절을 따르려 했다. 공은 부친과 같이 조선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향촌사회에서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했던 것이다.
족보에 의하면 공은 태조 이성계의 생질이였지만 출사하지 않고 공과 부친이 양양으로 내려간 시기는 정종대왕 초로 보인다. 바로 정종대왕 시에 부친 양렬공이 돌아가시고 태종 조에 출사한 것으로 보인다.(사헌부 응교, 사헌부 직장) 태종 상왕 시 세종 시에 첨지중추부사 연이어 첨지중추원사를 제수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세종12년까지 후학에 힘쓰시다 돌아가셨다.
충효를 겸한 공의 사표는 일찍이 정종이 仲氏되는 한평군 양경공(휘 연涓)에게 말하기를
“경(卿)의 아우 사(師, 가천재공)는 충효양전(忠孝兩全; 충성심과 효심 모두 완전 겸비하다.)했다.”고 하였다.
가천재공 선조의 사적을 대충 살펴보았다.


우리 후손들은 가천재 선조의 충효양전의 성품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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