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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06월
 
한양조씨대종보

한양조씨대종보 창간사 편집자 註 : 본 기사는 『한양조씨대종보』창간호(1998년 11월)에 게재된 기사로『한양조씨대종보』창간 당시 분위기와 각오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본래 취지와 대종회장의 뜻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원문을 유지하였습니다. 희망과 도약의 21세기 진입을 목전에 두고 우리 모두가 염원해 오던 대종회를 결성하고, 대종보를 발간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참여하고 도움을 주신 여러 종인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선조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켜 이를 자손만대에 전수하고 문중 간 돈독히 하며 잊혀져가는 숭조사상을 일깨워 우리의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해 대종보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양조씨는 시조 중서공(中書公, 휘 之壽) 이래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자손이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충신과 효자효부를 배출한 훌륭한 가문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뿌리를 더욱 중시하고 선조님들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문중 간 친목 증진과 유대강화가 문중 번영의 지름길이며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6개파로 계승되어온 한양조씨가 드디어 통합대종회를 결성하여 활발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조이신 중서공으로부터 근 800년 만에 한양조씨대종회를 결성하는 역사적으로 매우 큰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대종회는 동조동손(同祖同孫)이므로 서로 일깨워 언제 어디서나 ‘내가 대종회 주인’임을 자부할 때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조님들께서 이룩하신 위대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이어받아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으로 우리 문중의 번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계파별로 계획 운영되어 오던 모든 종중사업을 규합하여 대종회는 물론 지역별 지회를 조직하여 그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의 제향봉행과 유적수호, 유업선양은 물론 종족 간 친목증진과 후진양성을 위한 대동보를 수찬(修撰)할 것이며 선조문집의 번역 및 발간사업, 장학사업, 효자효부 포상 등을 추진할 것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 누적되어온 계파별, 개인별 이해관계를 해소하고 대종회 운영에 관계되는 모든 관행과 규범을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우리 한양조씨대종회가 날로 발전할 수 있도록 종인 여러분께서 적극 참여해 주시고 아낌없이 후원해 주시기 바라며 이제 출범하는 한양조씨대종회와 문중의 모든 자손들이 더욱더 번창하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 10월 대종회장 종익
 
 
  2018년 05월
 
양렬공

종사란 한 문중(門中)의 역사를 말한다. 즉 종중의 시조(始祖)로부터 현재까지 종중이 발전해온 자취를 말한다. 나라에 국사가 있듯이 한 문중에는 문중 나름의 종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중역사의 대표적인 기록물이 바로 종중의 족보(族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종사 연구의 주대상물이 바로 족보다. 족보의 체재(體裁)와 내용은 비문(碑文), 발문(跋文), 서문(序文) 등의 문헌록(文獻錄)과 세보(世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세보는 시조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면서 세계(世系) 순으로 남성 중심으로 이름, 자(字), 호(號), 출생과 졸년(卒年), 묘소의 위치, 행적(行績)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족보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종중 전체의 현황이나 개개인의 행적 등에 있어 부정적인 내용이나 기사(記事)는 가급적 제외하고 미화하거나 과장한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족보를 편찬하는 종인들은 자기 문중을 빛나게 표현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훌륭한 조상이 있으면 더욱 이를 과장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족보를 모든 종인이나 후손들은 선조들이 저술한 것이므로 이를 절대 신봉하고 있다. 사 학자요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재야사서(在野史書)인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위서(僞書) 논란(論難)이 있는 것을 논박하고 우리나라에 위서가 있다면 각 문중의 족보가 더러는 위서 경향이 있다고 평하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 54쪽, 1999년 5월 7일 단군학회 전반기 학술대회) 족보를 읽거나 연구할 때 이러한 족보의 특성을 미리 예견하고 살펴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족보의 가치나 의미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위와 같은 것을 전재로 종사연구의 작은 사례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양렬공(襄烈公, 휘 仁璧, 5세)의 사적(事績)이다. 우리 문중에서 13회 간행한 역대 족보에서 공(公)의 사적 중에 졸(卒)한 장소와 시기 그리고 불사이성(不事二姓)과 삼징칠벽(三徵七辟)의 표현에 대하여 전후 비교검토 해 보고자한다. 첫째. 신묘(辛卯, 1651)3권보에 공양조졸(恭讓朝卒)로 졸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고, 갑신(甲申, 1884)22권보까지 5번에 걸쳐 이종공양(以終恭讓)으로 기록돼 있어 공양왕 재위기간에 졸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신유(辛酉, 1921)24권보부터는 졸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실제로 졸한 시기는 언제인가? 공의 연보를 보면 1389(공양왕 1)년 11월에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에 임명됐는데 1390(공양왕 2)년 4월 9일 회군의 공으로 포상(褒賞)을 받은 공신 중에 이미 7명이 사망하였는데 그중에 삼사좌사(三司左使)인 공이 포함되어 [고려사 세가(世家) 45에 의함] 있어 공의 졸한 시기는 1389년 11월부터 1390년 4월 사이로 볼 수 있다. 둘째. 졸한 장소는 병오(丙午, 1926)7권보부터 귀로양양(歸老襄陽), 이종양양(以終襄陽), 퇴로양양(退老襄陽) 등으로 계미(癸未, 2003)18권보까지 기록돼 있다. 따라서 양양(襄陽)에서 졸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셋째. 불사이성(不事二姓)①이란 용어는 병오(丙午, 1726)7권보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7회 연속 이어지다가 신유(辛酉, 1921)24권보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갑자(甲子, 1924)보와 일통보(一統譜, 1926)에는 기록이 되었다가 갑술(甲戌, 1934)보 이후 계미(癸未, 2003)18권보까지 3회 연속 기록이 되지 않았다. 넷째. 삼징칠벽(三徵七辟)②이란 용어는 신유보(1921)에 기록되기 시작하여 갑자8권보(1924)와 일통보(1926)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갑술보(1934) 이후 계미보(2003)까지 3회 연속 기록되었다. 이상 공의 사적 기록 중 4가지 용어를 족보별로 검색하여 상호 관련성을 검토해 보면 불사이성은 공이 공양왕 때 이미 졸하였기 때문에 불사이성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당연한 사실을 왜 족보에 기록했을까? 첫째. 공이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한 후까지 생존했더라도 양양에 은거하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공은 공양왕 재위 때 판의덕부사로 임명되어 고려의 신하로서 끝까지 나라와 임금께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공의 연고지라 할 수 있는 양양에서 졸한 것이다. 둘째. 삼징칠벽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뒤 부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 공은 이미 졸했기 때문에 이 말은 해당이 안 된다. 삼징칠벽은 공이 이성계가 등극 후까지 생존해 매부인 공을 불렀다 해도 의리를 지켜 불응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생각에 이러한 말을 썼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유보(1921)에 삼징칠벽을 처음 기록하면서 졸한 시기인 이종공양(以終恭讓) 용어는 기록하지 않았다. 상호 표현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삼징칠벽 용어를 기록한 족보에는 불사이성 용어를 기록하지 않았다. 불사이성이나 삼징칠벽 용어가 족보에 등재된 배경에는 1628년 동명서원에 공이 배향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불사이성이나 삼징칠벽 같은 충의(忠義) 용어를 안 써도 공의 사적에 있는 것처럼 전범적(典範的)인 무인(武人)으로 만인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로 당연히 동명서원에 배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족보 속 인물의 묘사나 행적의 표현에 있어 미화 또는 과장된 용어 사용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표현을 하게 된 배경이나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다. 즉 빛나는 종중역사와 훌륭한 조상을 갖고자 하는 충정(衷情)이 일반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고 그 밖에 특별한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종사연구의 방향이 또 하나의 종사연구의 관점(觀點)이 될 것이다. 註① 불사이성(不事二姓) :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과 비슷한 말이다. 즉 고려조 임금을 섬기다가 조선조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註② 삼징칠벽(三徵七辟) : 초야에 묻혀 사는 인재에게 조정에서 세 번 부르고 군국에서 일곱 번 천거하였다는 의미(소학 - 善行 第 六 4)
 
 
  2018년 04월
 
창립총회 개회사

한양조씨대종회 창립총회 개회사 및 결성 발기 취지문 존경하는 문중 종친여러분 바쁘신 중에도 우리 한양조씨대종회를 결성하고자하는 뜻 깊은 이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여주신데 대하여 한양조씨대종회 결성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때마침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을 맞아 염원해 오던 대종회를 결성하게 되어 감회가 이를 데 없으며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참여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한양조씨는 인구 35만 명을 헤아리는 대성이면서도 이제까지 통합된 대종회 결성의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선조의 세덕과 위훈탁절(偉勳卓節, 뛰어난 공훈과 높은 절개) 역시 어느 명문대가에 비할 바 없는 큰 자랑인데도 우리 후손들은 너무 뒤쳐져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종인 여러분 오늘이 이 안타까움을 해소하는 날인 동시에 모든 종친들이 하나가 되어 한양조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다짐하는 새 역사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뿌리를 알고 조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 조상을 모신 자손들이 화목하게 단결하고 번창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잘못됨이 있었다면 서로 이해와 아량으로 극복하고 과거의 잘못을 일소해야 합니다. 오늘 씨를 뿌린 한양조씨대종회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뻗어나 모든 자손들에게 무성한 잎과 열매를 전수해 줄 수 있도록 여러분이 물을 주고 가꾸는 관심과 사랑을 아끼지 말아 주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을 위해 뜻을 모아 주시고 노력하여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결성대회가 차질 없이 잘 진행되어 여러분이 바라는 훌륭한 대종회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997년 5월 20일(화) 10시 명륜동 유림회관 3층 강당에서 대종회창립추진위원장 종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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