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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0월
 
병만(柄萬)

병만(柄萬) 이사 대종회관건립기금 200만원 쾌척 조실부모하고 평생 농사지으면서 대소가의 종사에 물심양면으로 앞장선 높은 숭조정신 본받아야 병만(柄萬, 23세, 충무공파, 사진) 대종회 이사가 대종회관건립 기금으로 써달라며 200만원을 기탁하여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다. 병만 이사는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한양조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병만 이사가 8살 때 아버지는 어린 남매와 부인을 남겨놓고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중부(仲父)는 아버지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뜨셨고, 백부(伯父) 마저 2년 후에 별세하여 험한 세상을 홀로 살아야 했다. 성장을 하면서 또래들은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나갔지만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두고 나갈 수 없어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으니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았다. 그렇게 알뜰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니까 밥은 굶지 않았고, 자기 명의의 전답도 구입하였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종인은 주변의 꼬임에 빠져 애써 모은 재산을 여러 번 잃었다. 비록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백부의 가르침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명문가 후손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도리에 대하여 듣고, 제례 등 집안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다보니 명문대가의 후손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을 갖추게 됐다. 특히 훌륭한 선조님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한양조씨로서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살라는 훈육을 받았기에 조실부모하고 학교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배운 사람보다 의젓하고 언행을 바르게 하여 주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시조단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충무공 시제를 비롯하여 선조님을 모시는 일에는 720여리의 먼 길을 빠짐없이 그것도 항상 제일 먼저 도착하였다. 필자의 족숙(族叔)인 병만 이사는 대소가의 종사에도 앞장서서 참여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왔기에 아재의 높은 숭조정신은 익히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또 한 번 높은 애종심을 보여줬다. 지난 7월 2일 200만원이라는 뭉칫돈을 대종회로 입금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인사를 하려고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도 연결이 쉽지 않았다. 며칠 지난 후에 겨우 연결이 되었는데 첫마디가 바쁜데 그만한 일로 쓸데없이 전화한다고 핀잔을 준다. 대종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애쓴다며 35만의 숙원인 대종회관을 꼭 건립하자는 병만 이사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뛰고 힘이 솟았다. 병만 이사가 기탁한 200만원은 88세에 농사를 지어 마련한 돈이기에 그 가치는 논할 수 없는 거금이다. 억대의 거금과 천칭(天秤)에 올려놓고 달아도 결코 가볍지 않은 값어치가 높은 성금이라 확언한다. 더욱 반가운 것은 슬하에 2남 1녀를 뒀는데 모두 아버지의 뜻에 따르며 응원을 보내는 효자로 알려져 있다. 건강을 생각하면서 농사일을 하라는 인사를 드리고 전화를 끊으며 집안에 선조님의 음덕이 충만하길 기원하였다.
 
 
  2021년 09월
 
사월(沙月) 조임(趙任)

임란 의병 시의 백미(白眉) 사월(沙月) 조임(趙任)의 「남정(南征)」 萬曆壬辰夏  만역임진하 妖氣蔽海垠  요기폐해은 如何滔天惡  여하도천악 八城皆沈淪  팔성개침륜 - (중략) - 耐苦風露宿  내고풍로숙 矢心日星明  시심일성명 何日定戎衣  하일정융의 仰慰宵旰情  앙위소간정 만력 임진(1592년) 여름 요상한 기운 험한 바다 덮었네. 어찌하여 천악이 넘쳐 온 천하가 모두 잠겨버렸네. - (중략) - 풍찬노숙의 괴로움 견뎌내면서 화살에 거는 마음 일성처럼 밝도다. 어느 날 오랑캐를 평정하여 소의간식하는 임금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고. * ‌지면관계로 시의 전문(5언 78구)을 싣지 못하는 점 양해를 구하며 전문은 『月潭軒世稿』를 참고 바람. 위의 시는 필자의 11대조 사월부군(沙月府君, 휘 任, 13세, 양경공파)의 「남정(南征)」 시의 시작과 끝부분이다. 「남정」 시는 5언 78구로 이루어진 장편서사시다. 이 시는 공(公)이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 창의(倡義)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 영양에서 청송, 의성, 팔공산, 화원, 창녕에 이르는 400여 리의 먼 길을 2박 3일에 걸쳐 가는 동안 피난으로 텅 빈 마을의 정경과 피폐한 백성의 삶을 시적 형상화하고 있으며, 화왕산성에서 의병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선비의 기상과 전쟁에 대한 결의, 그리고 마침내 오랑캐를 평정하고 나라와 임금의 안녕을 기원하는 애국충정의 임란의병시(壬亂義兵詩)다. 영양 조문(趙門)은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논의하던 중) 망우당의 편지를 받고 공의 숙부인 약산당(휘 光義)께서 자질(子姪) (큰집 조카인 수월공(휘 儉)과 사월공, 아들 연담공(휘 健)과 호은공(휘 佺)을 거느리고 쌀 5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家臣) 40여명을 거느리고 망우당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그 결과 영남의병 315위의 위패를 봉안한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전 집안 다섯 분이 모셔졌으며, 지난 6월 『경북신문』에서는 호국의 달을 기념하여 “임진왜란 때 창의한 경북 영양 한양 조씨의 충절, 조씨 가문 전체가 의병에 참가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다.”(2021년 6월 23일자)며 전면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이 시는 임란이 일어난 1592년 더운 여름 고향 영양을 떠나 임금의 의주파천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가는 도중 마을의 집들은 텅텅 비고 “所過兢逃竄 十里不逢人(지나가는 곳마다 다투어 도망하여 십리를 가도 사람 만나지 못하고)”라고 하여 전쟁의 두려움에 피난 간 백성들의 정황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문소현(현 의성), 대구를 거쳐 3일 만에 화왕산성에 이르기까지 여정의 어려움과 전쟁으로 다치거나 피난 간 마을의 정황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기행시(紀行詩)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화왕산성에 도착하여 각처에서 모인 의병들과 만나자 서로 의기 투합하여 가슴 속 회포를 풀고 미력이나마 다해 싸울 것을(旣云同聲氣 聊與吐胸臆 敢效蟻力) 다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영남이야말로 충절의 선비가 많아 곳곳에 선비의 기상이 용솟음치고 화왕산성이야말로 영남의 보루(矯南仗節多 在在氣如洸 煌煌火旺城 大嶺一保障)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풍찬노숙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전쟁에 이겨 임금님을 편안하게 해 드릴 것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남정」은 임란 의병 전쟁시의 하나로 2000년 김영숙(金榮淑) 교수의 「임란 중 영남의병 관련 한문학 작품조사 분석」을 통하여 임란의병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게 된 이후 『한국문학통사』(조동일(趙東一, 27세, 양경공파) 著)에 임란의병시의 백미로 기록되었다. 사월공은 선조 6년(1573년) 원당리에서 입향조(휘 源)의 손자로 태어나서 조실부모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렬하여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5년(1613, 癸丑)에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으시고, 다음 해 다시 선교랑 군자감 판관, 광해군 13년에 통정대부를 제수 받으셨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자 이괄의 난(1624)과 흉년 등으로 나라의 재정이 고갈돼 군자(軍資)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곳간을 열어 군수(軍需)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공의 충정에 조정에서 자헌대부지중추부사에 승임(陞任)되고 삼대 추숭의 은전을 입으시니 영양 입향 삼대 째에 명문세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는 연세가 높아 직접 군문에 나아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척화소를 올리는 한편, 백씨인 수월공과 함께 단을 쌓고 나라의 안위를 기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삼전도 화친이 맺어지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바깥세상과 연을 끊고 경학에 전념하였다. 인조 22년(1644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였다. 공의 부음에 멀리 포천의 문간공(文簡公, 휘 絅, 13세, 양경공파)은 만사(輓詞)에서 “遠寄相思淚 英山入夢愁(멀리서 상사의 눈물 보내니 영양의 산천이 꿈속에 어리네.)”라며 애통해 하였다. 이후 이조참판 긍암(兢庵) 이돈우(李敦禹)의 찬으로 공의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공의 제택(第宅)인 월담헌(月潭軒)은 국가유형문화재 294호로 지정(2017. 12. 29)되어 보호되고 있다.
 
 
  2021년 08월
 
조성훈

성훈(成薰, 26세, 양경공파) 대종회 부회장은 선친(휘 紀行, 아호 德祐) 후손들을 규합한 덕우공종중(德祐公宗中)을 2010년도에 창립하여 후손 돈목과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종중을 운영하려면 적지 않은 경비가 소요되는데 회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공부는 잘 하는데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학업을 포기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자신 소유의 오피스텔 2채를 덕우공종중에 기증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손들이 돈 걱정 없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우선 마포구 요지에 위치한 시가로 한 채에 3억 정도하며 월세를 60여만 원씩 받고 있는 오피스텔 2채를 장학회로 명의를 이전하였고, 한 채 남아 있는 본인 소유의 오피스텔도 기증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본인 소유의 재산은 현재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 전세금뿐이라고 한다. 성훈 부회장은 유년시절 돈령공의 산소가 지척인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처럼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는 아버지의 생활 그 이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첫째 아들이 100일도 안 된 신혼의 달콤함을 접고 부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처자식을 떼어놓고 무작정 상경하여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눈비를 피하고 잠을 자며 막노동을 하다가 종로3가에 있는 스테인리스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여 3년 만에 단칸방을 마련한 후 처자식을 불러올렸다. 그러나 고향의 부모형제를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할 때의 꿈을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기 위해 용산 청과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며 과일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행상이 자리를 잡아 단골도 생기고 벌이도 나아졌지만 너무 몸을 혹사하여 생긴 척추디스크가 발병하여 3년간 투병한 후 겨우 몸을 추스른 후 몸을 쓰는 일은 어려워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20대 후반에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이 분야는 이제까지 겪은 고생은 비단길이더란다. 속이고 음해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완력과 험담으로 성사된 계약을 방해하고 빼앗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난장판이 따로 없더란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고 매매자의 입장에서 조언을 하니까 단골 고객이 생기고 그들이 손님을 끌어오고 큰 고객이 생기게 되었단다. 그래서 성훈 부회장은 단골손님이 많고 큰손님이 많다고 한다. 한양조씨 소종중에서도 성훈 부회장을 통해 종중 건물을 구입한 종중이 여럿 있다. 이 문중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대성부동산’을 통하면 시세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고 건물도 틀림없다’고 한다. 30대 초반에 독립한 성훈 부회장의 철학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며 고객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객의 입장에서 건물 상태와 주변 환경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알려주고, 중개수수료도 법정수수료보다 적게 받으니 단골 고객이 생기더란다. 마포구 도화동에 열고 있는 ‘대성부동산’은 이제 딸이 운영하고 있고, 성훈 부회장은 단골인 큰손님만을 상대하며 덕우공종중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부모가 남긴 재산을 놓고 형제간에 갈등하는 물질만능인 요즘,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격언을 실천에 옮기는 성훈 부회장이야 말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큰 어른이다. 아무쪼록 덕우공종중(德祐公宗中)이 번창하길 바라며 장학사업이 큰 결실을 거둬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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