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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0월
 
국불천위 선조님

불천위(不遷位)란 큰 공훈을 세워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를 이르는 말이다. 부조묘(不祧廟)란 불천위를 받은 사람이 죽은 뒤 4대봉사가 끝나도 신주를 묻지(埋安) 않고 사당(祠堂)에 모셔놓고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별묘(別廟)라고도 한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유림의 발의로 정한 유불천위(儒不遷位) 또는 향불천위(鄕不遷位), 문중에서 유명한 조상을 자체적으로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로 구분한다. 심지어 집안에서 정한 가불천위(家不遷位)도 있다. 한양조문의 국불천위 선조님은 7위로 개국·정사·좌명 3훈공신 충무공(5세, 휘 英茂), 한산부원군 충정공 (5세, 휘 仁沃), 한천부원군 양절공(6세, 휘 溫), 한평부원군 우의정 양경공(6세, 휘 涓), 문묘에 배향된 문정공(10세, 휘 光祖), 동지중추부사 한흥군(12세, 휘 公瑾), 판중추부사 문간공(13세, 휘 絅) 등인데 2회에 걸쳐 알아본다. ① 개국·정사·좌명공신 충무공(5세, 휘 英茂) 개국·정사·좌명공신으로 1369년(공민왕18) 요경과에 급제하셨으며, 충정공(忠靖公, 휘 仁沃, 5세)의 천거로 조선 창업대열에 참여 조선개국삼등공신에 책록되셨고 태종묘정에 배향되셨다. 1차 왕자의 난(1398년) 때에 정사(定社)일등공신, 2차 왕자의 난(1400년) 때에 좌명(佐命)일등공신으로 충무(忠武)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부조묘(休巖廟)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 있다. ② 한산부원군 충정공 (5세, 휘 仁沃) 위화도회군 공신으로 척불숭유와 전제개혁을 지지해 신진세력 기반구축에 기여하셨고, 1392년 이조판서로 조선개국을 도왔으며 원훈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에 책록되셨고 태조묘정에 배향되셨다.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오르셨고, 충정(忠靖)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부조묘(忠靖祠)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다. ③ 한천부원군 양절공(6세, 휘 溫) 개국(開國)이등공신, 정사(定社)이등공신, 좌명(佐命)사등공신이시며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내자시사를 지내셨고,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진봉되셨다.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서 1품까지 올랐으나 청백하고 스스로 제어해 빈한한 선비와 같으셨다. 양절(良節)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④ 한평부원군 우의정 양경공(6세, 휘 涓) 1386년(우왕12) 반궁(泮宮, 성균관)에 들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1392년(공양왕4) 공조총랑을 지내셨으며,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때 좌명(佐命)사등공신이 되셨다. 1417년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지셨고, 1426년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셨다. 양경(良敬)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부조묘(甫羅齋)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보라동에 있다.
 
 
  2022년 09월
 
사평공

고려말 조선초 명신 사평공 단종에 대한 충절로 계유정란 시 남해로 유배, 동학사 숭모전과 함평 정절사에 배향 사평공(司評公, 휘 賡, 6세, 충정공파) 선조님은 조선조 개국 일등공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충정공(忠靖公, 휘 仁沃, 5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공께서 평소 절의를 숭상하셨고 세종(世宗)조에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評)으로 출사하여 전보승진 봉직하신 것 외에 일생을 유배지에서 사셨는데, 할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얼마나 팍팍하셨을까? 가슴이 아프다.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端宗)이 왕위에 오르자 1453(단종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의 고명대신과 반대파들을 참살하고 정권을 전횡하자 장조카인 이조참의 파서공(坡西公, 휘 順生)이 정도가 아님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간당으로 몰려서 1454(단종2)년 귀양을 갔다가 순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과 공의 아우인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판사공(判事公, 휘 貫)이 남해로 유배되었고, 종손(從孫)인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휘 섬(銛)마저 남해로 유배되는 등 일가문에서 아홉 사람이 참화를 입었다. 공께서는 유배지에서 단종이 해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쪽을 향해 통곡하며 충절을 변함없이 지키면서 초어생활(雄魚生活)을 하다가 순절하여 일생을 마치셨으나 안타깝게도 묘는 실전되었다. 1468(세조14)년에 14년의 장구한 유배에서 사면되었으나 아우 판사공으로 하여금 종사와 선영을 돌보도록 하고, 절의를 굽히지 않고 절망과 암흑의 유배지에서 홀로 해양(海洋, 現 남해) 노량강(露梁江, 現 섬진강)가에 머물며 고기잡이와 나무꾼들 속에 섞여 운명할 때까지 흰옷을 입고 정절을 지키셨다. 후세 사람들은 해양정절(海洋靖節)이라고 호칭하였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봉안(奉安)되 셨다. 이후 향촌의 유림들이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에 정절사(靖節祠)를 세우고 아우인 판사공과 함께 봉안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아들 휘 서(瑞)는 통정대부 현감이고 손자 휘 원기(元基)는 진사이며 증손에 이르러서야 휘 맹생(孟生)이 이조정랑(吏曹正)을 역임하시고 이조참판에 추증됨으로서 명문거족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이후 가세가 번성하여 전라도 함평현으로 이거하였고, 후손들이 무안현(務安縣) 등으로 가세를 넓혔다. 공의 많은 것이 궁금한데 묘도 실전되고,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는데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왜 돌아오지 않으셨을까? 할머니는 누구일까? 타향에서 세상을 뜰 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감히 공의 높은 정신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직계 후손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나마 선조님의 유훈을 되새겨 본다.
 
 
  2022년 09월
 
조목영

군수공파 종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목영(睦泳) 주손 군수공파종회 자립기반 확립을 위해 노력, 대종회관건립기금도 100만원 쾌척 경상북도 북부지방은 서원과 명문 종가가 많아 유교문화와 민속문화가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며 내노라하는 문중이 옛 풍습을 고수하여 예의범절에 어긋나게 언행을 하면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한양조씨가 영남지방에 정착한 것은 기묘사화(1519년) 이후로, 정암(靜菴, 휘 光祖, 10세, 양절공파)공이 모함(역모)으로 사사되었을 때 병참공(휘 憐, 7세, 양경공파)의 둘째 아드님이신 군수공(휘 云從)은 기묘사화 전에 이미 한양에서 별세하셨고, 군수공의 외아드님이신 현감공(휘 琮))께서 어머니와 아들 6형제 등 가솔과 함께 처가가 있는 영주로 낙남하셨다. 필자는 병참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군수공의 주손인 목영(睦泳, 26세) 대종회 이사를 자랑스런 한양인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목영 이사는 병참공파종회에도 이사로 40년 넘게 종사에 참여하고 있다. 군수공파종회는 종회 차원에서 영남지방의 쟁쟁한 타 문중에 뒤지지 않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손으로서 할 일도 많고 역할도 커서 잠시도 마음과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도 없단다. 시제는 물론 군수공파종회, 화수회, 군수공 이하 소종중 모임 등으로 빈번하게 지방을 오르내리며 백인백색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마음을 도닥여 문중이 화목하도록 노력하고, 주손으로써 갖춰야 할 덕목을 쌓기 위해 배우고 실천하여 종인은 물론 집안 어른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대종회와 병참공파종회의 종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문중의 발전을 위해 의견을 제시하고, 특히 종재가 열악한 대종회가 자립기반을 마련키 위해 펼치는 대종회관건립기금 모금운동에 100만원을 쾌척해 주변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또한 병참공파로부터 배정받은 위선사업비를 집행하는데 분분한 종인들 의견을 하나로 모아 인천광역시 주안동에 상가건물을 구입하였고 미흡하고 분실된 행정서류 등을 직접 뛰어다니며 해결·보완함으로써 군수공파종회의 자립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목영 주손의 증조부(휘 式容)께서는 조선말 일곱 선비들이 죽령재 바위에 “살면 恨이요 죽으면 神”이라는 글귀를 새겨놓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다 의금부에 하옥되자 조부께서 엽전을 마차에 실어다 바치고 방면을 받았는데, 나라를 잃은 울분에 가산을 탕진하고 60년간 종중을 출입하지 않은 아픈 일화가 있다고 한다. 목영 주손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부터 종사에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하였고, 1978년에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병참공파종회 대의원으로 종사에 입문했다. 40여 년 전 양경공(휘 涓, 6세) 선조님 시재에 처음으로 참석했는데 연로한 어른들이 쌈짓돈을 풀어 1만원, 5만원씩 향전금을 내는 것을 보고 문중 어른들의 선조숭봉 정신과 종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명을 받아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긍심을 느꼈단다. 끝으로 대종회가 위선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장학사업을 펼칠 수 있는 자립기반인 대종회관이 조속히 건립되도록 35만 종인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으자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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