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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종친은 구한말(舊韓末)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바지하고 우리 문중(門中)을 빛낸 근현대(近現代)의 인물 중 작고(作故)하신 분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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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선(趙孟善, 1870~1920)
 
을사5적 죽이려다 뜻 못이루고 의병모집
만주에서 대한독립단 조직, 항일투사 양성


충무공파 22세. 황해도 평산 출신. 자는 성호(聖浩), 호는 원석(圓石). 1890년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손자(孫子) · 오자(吳子)의 병법(兵法)을 익히고 제세안민(濟世安民)에 뜻을 두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5적(賊)을 죽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의선 계정(鷄井)과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남만주로 가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단장이 되어 항일투사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친일단체인 일민단(日民團), 보민회(保民會), 강립단(强立團) 등을 분쇄하였다.

1920년 독립군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독립단,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만주 일대의 군사기관이 통합되어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직할의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자 광복군사령장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창설된 광복군 총영(總營)을 지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병봉(趙炳鳳, 1930~2006)
 

숭조회장으로 대종회 통합 적극 추진

양경공파 24세. 경기 남양주 출신. 육군사관학교 수료. 美 골든스테이트大에서 경영학 박사. 경기도 도의원, 한전 정책조정실장, 11·12대 국회의원, 무임소장관(현 정무장관)을 지냈다.

한양조씨숭조회(崇祖會)의 2대 회장으로서 1976년 판도공파와 총관공파의 통합대종회 발기총회를 추진하는 등 대종회 통합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금성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 목련장,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조병옥(趙炳玉, 1894~1960)
 
항일독립·반독재민주화 투쟁 선봉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전 서거


충정공파 24세. 충남 천안 출생. 호는 유석(維石). 연희전문학교 및 미 콜럼비아대(大) 경제학과를 수료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1925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1927년 광주학생 의거로 3년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거쳐 1948년 제3차 UN총회 정부대표단의 수석대표가 되어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적 신임을 얻는데 기여하였다.

1950년 6.25동란 때 내무부장관으로 대구를 사수하여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9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갑작스런 건강 상태의 악화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치료중 불행히도 선거 전에 서거하였다.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광복 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선봉이 되었다. 그의 정치관은 폭이 매우 넓고 거시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가 노골화되자 민주당을 창당하여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빈대를 잡기 위하여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고 하는 국가관과 정당관을 남겼다.

저서는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병일(趙炳日, 1916~1985)
 
공직자와 불자佛子로서 청렴강직한 생활
억울한 사람돕고 인권신장·수심修心전력


양경공파 24세. 경기 남양주 출생. 호는 보천(普泉).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졸업. 1948년 군법무관 제1기로 임관, 6.25동란 중 전투에 참가하여 화랑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1960년 4.19직후 육군법무차감(육군 대령)으로 전역하여 5.16군사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 법무부장관, 소청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법무부장관 재임시 형무소의 명칭을 교도소로 바꾼 것을 비롯하여 재소자에게 1인(人) 1기(技)교육, 모범수의 귀휴(歸休)제도, 기독교 일색의 교도소와 군 부대에 불교포교를 위한 군승(軍僧)제를 시행하고 법당(法堂)을 짓게 하였다. 법을 몰라 피해를 보는 억울한 시민을 위한 무료법률상담소의 운영, 장관 시절 남은 출장비의 반납 등 작은 일부터 철저한 청백리의 삶을 솔선수범하였다.

대한불교청년회장, 불교신문 논설위원, 달마회장(達磨會長) 등으로 수심(修心)에 전력하고 양경공파종회장, 대종회 부회장으로 1976·7년 판도공파와 총관공파가 통합하는 대종회의 기틀을 마련한 중심 인물이었다.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순수시 고집한 마지막 로맨티스트
성실한 시작詩作활동, 폭넓은 독자사랑


양절공파 24세. 경기도 안성 출생. 호는 편운(片雲). 경성사범 졸업, 일본 동경고등사범수학.

1947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인간의 숙명적 허무와 고독을 쉽고도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그렸다는 평가와 더불어 성실한 시작활동으로 폭넓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시를 통해 전후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위안을 준 우리 시단(詩壇)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시는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도 번역·출판되었다. 경희대 교육대학원장, 인하대 대학원장, 제4차 세계시인대회장, 계관시인(桂冠詩人), 한국시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안성시는 해마다 5월에 ‘조병화주간’을 설정, 『조병화문학관』(www.poetcho.com)과 공동으로 ‘편운문학상’ 시상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고 있다.

53권의 창작 시집과 5권의 화집(畵集)을 비롯하여 160여 권의 저서를 내고 20여 차례의 시화전(詩畵展)을 가졌다. 교육과 문단에 기여한 공로로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와 카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시아 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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