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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조 안정공(安靖公) 서(敍)]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 예조(禮曹) 참의(參議), 예문관 제학(提學),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고 안정(安靖)의 시호를 받았다.

[6세조 도총제공(都摠制公) 질(秩)]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지냈다.

[6세조 남원공(南原公) 전(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남포진병사(藍浦鎭兵使) 겸 남원부절제사(南原府節制使)를 지냈다.

[6세조 참판공(參判公) 윤(倫)]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兵曹參判)과 검교참찬(檢校參贊)을 지냈다.

[6세조 호군공(護軍公) 리(理)]
호군(護軍)을 지냈다.

[6세조 양절공(良節公) 온(溫, 1347~1417)]
개국·정사·좌명공신에 한천부원군
좌찬성까지 오르고 청렴검소로 유명

개국(開國, 1392년· 태조1년 조선 개국의 공) 이등공신·정사(定社, 1398년·정종 1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세운 공) 이등공신·좌명(佐命, 1401년·태종1년 제2차 왕자의 난에 세운 공) 사등공신이 되었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겸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를 역임하고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공의 훈공(勳功)은 태종조의 교유문(敎諭文)과 정종조의 사패전답왕지문(賜牌田畓王旨文)에 잘 나타나 있으나 임진왜란때 유상(遺像)과 세적(世蹟)이 실전되어 언행, 사적, 관계의 내력을 상세할 수 없고 보첩(譜諜), 기(記), 전(傳)에 나온 것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문절공〔文節公, 원기(元紀)〕이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양절, 양경이 효도하고 청렴하며 충성으로서 함께 좋은 시호(諡號)를 받았고 양절공은 세 번 큰 공을 찬조하였으되 모두 훈공에 이룩된 바로서 곤궁한 일가에게 나눠주고 초가집 두어간에 말(馬)을 돌릴 곳이 없었으며 식탁에는 색다른 음식이 없고 좌석에는 깔 방석이 없어 나이가 80에 가깝도록 시종여일했다.』하였다.
또 양절공이 돌아가신 후, 그의 아들이 집을 짓고 양경공을 청하여 낙성하려 했을 때 양경공은 도착하자 섬돌(石階)을 보고 마루에 앉지도 않고 나가면서 말하기를 『백씨(伯氏)께서 사는 집에 섬돌의 층계를 만들지 아니한 것은 어찌 재력이 부족해서인가 ! 너희들이 선인(先人)의 검소한 덕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제 석축으로 층대를 만들었으니 나는 다시는 너의 집에 들지 않으리라.』하였다.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서 직위가 일품(一品)까지 올라 가문이 융성하고 영광과 은총이 혁혁하였으되 일체 청백하고 간략함으로써 스스로 제어해서 쓸쓸하기가 빈한한 선비와 같았으니 독특한 지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인 장씨(張氏)·박씨(朴氏)와의 사이에서 5자 3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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