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배움터 > 빛을 남긴 선조
 
시조 | 2세조 | 3세조| 4세조| 5세조
 

[3세조 참찬문하부사공(參贊門下府事公) 순후(珣厚)]
생졸년 미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냈다.


[3세조 부원수공(副元帥公) 양기(良琪)]
여원연합군의 부원수로 일본 정벌 출정
그 때 받은 금포옥대는 지금까지 세보

생졸년 미상.
자는 보세(寶世). 13세에 쌍성총관을 물려받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겸하였다. 약관(弱冠) 에 김방경(金方慶)의 제2차 일본 원정군의 부원수로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온 공 〔혹은 원(元)의 반란군인 합단(哈丹)군이 철령을 넘어온 것을 공(公)이 포로로 잡아 바친 공이라는 설(說)도 있음〕을 세워 1281년(충렬왕 7) 원(元)의 세조로부터 금포옥대(錦袍玉帶)를 받았다. 정부인(貞夫人) 능성(綾城) 박씨(朴氏)와의 사이에 용천부원군 림(琳)·용성부원군 돈(暾) 형제와 1녀를 두었는데 1녀는 후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李成桂)의 조부인 춘〔椿, 도조(度祖)로 추존(追尊)되었음〕의 첫 부인 박씨(朴氏)가 자춘(子春)을 낳고 돌아가심에 후 부인이 되었다. 묘는 영흥군 덕흥면 용천리에 합장하였다. 1757년(영조 33)에 세운 신도비문은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짓고 그의 아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썼다.

[금포옥대(錦袍玉帶) ]

금포는 낡아 없어지고 옥대만 전해 오다가 1864년(고종 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빌려서 애완하고 보수하여「어람옥대(御覽玉帶)」라 손수 쓰고 문헌공(文憲公) 성교〔性敎, 1818~1876, 10세조 문정공(文正公) 광조(光祖)의 11세손, 생부(生父) 형관(亨觀),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기유보(己酉譜) 발문(跋文)을 썼음〕에게 돌려주어 문헌공이 그 사적을 적은 것이 1867년의 일이다. 1882년에 대원군이 다시 빌리기를 청하여 빌려주었으나 돌려주지 않고 1897년(고종 34) 별세하여 원묘(園墓) 속의 부장품(副葬品)이 되었다. 1907년(순종 1) 왕(王)에 준하는 예우(禮遇)로 묘를 개장(改裝)할 때, 참서(參書) 종만(鍾萬)이 대원군이 빌려 갈 당시의 답서(答書)를 제시하고 찾아왔다. 당시 왕실에서는 조씨 문중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 옥대를 대원군의 유언에 따라 관속에 넣은 것이라 하였는데 대원군 답서의 내용은 『홍옥대는 두 번째 보는 것인데 잠시 여기 두는 것이 어떠한가 (紅玉帶是再見者 姑留此如何)』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 옥대는 일찍이 화재에도 화를 면했던 일, 옥 한과를 잃었다가 백 여년만에 다시 찾아 보완했던 일 등 칠 백여년 동안에 세 차례나 기이한 일이 일어 났으니 진실로 매우 드믄 보배라 아니할 수 없다. 판서(判書) 종필〔鍾弼, 1840~1915, 문헌공 성교(性敎)의 아들로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냈음)이 참서(參書) 종만(鍾萬), 부경(副卿) 종서(鍾緖)와 함께 서울 근방의 종인들로부터 30원을 갹출하여 옥대 내부에「한양조씨세보(漢陽趙氏世寶)」라 수놓고 보수하였다. 1913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종호〔鍾灝, 1858~1921, 문목공(文穆公) 극선(克善)의 9세손〕가 종필(鍾弼), 종서(鍾緖)와 의논하여 ① 옥대는 종손이 부조묘의 철궤에 넣어 보관할 것. ② 흠이 생기면 별도계획을 세워 수리할 것. ③ 종중의 혼례시에도 5리밖에는 빌려주지 말 것 등 세 조목의 관리 종약(宗約)을 정하여 시조공(始祖公)의 23세손인 필원(弼元)의 집에서 보관하다가 현재는 서울시립 역사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금포옥대에 관한 기록은 진사(進士) 일원(一元)이 찬(贊)을, 도승지(都承旨) 성교가(性敎)가 1867년에 옥대기사(玉帶記事)를, 감찰(監察) 종호(鍾灝)가 1917년에 옥대보수전말(玉帶保守顚末)을,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옥대에 진사 종석(鍾奭, 문간공文簡公 경絅의 10세손, 명필·명문장가)이 1921년 도설(圖說)을 지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붉은 옥대는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하사(下賜)하고 우리 19대조(代祖)가 받았다. 이 때 공(公)의 연세가 21세인데 미혼으로서 큰 공을 세웠으니 원제(元帝)가 장히 여겨 유시(諭示)하기를 “그대는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니 이것을 입고 동방으로 돌아가 어질고 착한 배필을 맞아 아름다운 자손을 낳아라.” 했다. 이러므로 대대로 전하면서 친영(親迎)할 때에 의식을 갖추는 예복으로 삼아왔다. 일찍이 화재를 만났어도 화를 면하고 옥 한 과를 잃었다가 백여 년만에 다시 찾았고 흥선대원군의 부장품(副葬品)으로 들어갔다가도 개장(改裝)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왔으니 참으로 조씨 유래의 보물이라 이르겠도다. 화공(畵工)에게 그리고 석판(石板)에 인쇄하고 족보에 붙여 천하 후세로 하여금 그의 형체가 이와 같고, 빛이 이와 같고, 내력이 이와 같음을 알게 하노라.! 옥대 받은 후 641년 신유(辛酉) 중추(仲秋) 상완(上浣)에 부원수공 20세손 진사(進士) 종석(鍾奭)은 공경하여 기록하다.』

........................〔시조공(始祖公)을 비롯한 선대(先代)의 시대배경(時代背景)

12세기경, 중국 북방에 널려 살던 몽고족에 테무진(鐵木眞, 1155 ~1227)이 나타나 내외의 몽고족을 통일하고 1202년(신종 5) 몽고의 귀족회의에서 칭기즈칸(成吉思汗)이란 칭호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창건된 몽고제국은 재물약탈과 노예획득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시베리아와 동유럽까지 점령하고 1215년(고종 2)에는 드디어 금(金)의 수도 연경(燕京)을 함락, 북중국을 평정하였다. 그 뒤 몽장(蒙將) 사르타이(撒禮塔), 자랄타이(車羅大) 등이 1231년부터 30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면서 전 국토는 거의 초토화(焦土化)되었다.

몽고는 1258년에는 화주(和州, 현 영흥)에 철령 이북을 관장하는 쌍성총관부(1258~1356)를, 그리고 계속 군대를 보내어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서경(西京, 현 평양)에 동령총관부(東寧摠管府, 1270~1290)를, 삼별초군(三別抄軍)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이 끝나자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1301)를 두어 원(元)의 직할지(直轄地)로 삼았다.
개경에는 일본 원정 준비와 내정간섭 기관인 정동행성(征東行省, 1270~1356)을 설치하고 전국에 72인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고 하는 몽고인 감독관을 주둔시켰다. 1270년(원종 11)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에 환도하면서 고려는 완전히 몽고의 간섭을 받는 부마국(駙馬國) 이 되어 원종 이후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역대 왕의 시호(諡號)에 몽고 왕실에 대한 '충(忠)'자를 붙이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몽고가 국호를 '원(元)'이라 칭한 것은 1271년의 일이다. 원은 고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압박과 간섭을 하였다.
몽고의 침략기 중 고려 집권층의 호화생활은 여전하였고 백성들은 무능·무력하고 징세에만 가혹한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백성은 원元의 무제한적인 조공물(朝貢物) 요구와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으로 인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원의 침략은 부인사의 대장경과 황룡사의 9층목탑 등 귀중한 문화재를 소실시켰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몽고의 침략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조판(彫版)한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우리의 국보임과 동시에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값진 문화재가 되었다.
충렬왕 때 안유(安裕)는 송(宋)에서 일어나 원元으로 전승되었던 주자학(朱子學)을 처음 도입하였는데, 이는 뒤에 조선이 개국하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유교정치의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수용되었다.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은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면화씨를 가져와 의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우왕 때 최무선(崔茂宣)은 화약제조술을 습득하여 왜구 소탕에 이바지하였다.
 
ADD. 110-052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가길 28 광화문플래티넘 601호. TEL: 02-738-4035~6. FAX: 02-738-4050
Copyright ⓒ 2005 한양조씨[조씨문중]. All rights reserved. E-Mail: hancho-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