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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序文)▒
시작도 끝도 없는 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한양 조씨의 선조와 후손으로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은 13세기 한반도의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을 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어지니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종중(宗中) 세덕(世德)을 남긴 선조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나 여기서 『빛을 남긴 선조』는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쌓아 내려오신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7세조까지의 선조님과 8세조 이하에서 문묘(文廟)·종묘(宗廟)·서원(書院) 등에 배향되신 분, 시호(諡號)와 부조묘를 받으신 분, 문형(文衡)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신 분 등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고려·조선과 같은 봉건 왕조시대의 농경사회에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지만 오늘날의 복잡다양한 정보사회에서는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수히 많아 앞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훌륭한 후손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특히, 청소년 종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그 분야에서는 내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이며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자신감으로 남에게 인정을 받고 스스로 권위를 세워 나라와 문중을 빛내 주기 바란다. 요즘 세계화가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여도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한 민족과 문화의 정체성(正體性)부터 똑바로 알아야 올바른 역사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아는 노력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든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였다고 본다.

우리 한양 문중과 종친 여러분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있기를 바란다.

[1세조 시조공(始祖公) 조지수(趙之壽)]
고려조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
묘소 실전, 양주 단소에서 시제

생졸년(生卒年) 미상.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추록(追錄)에 의하면 고려조(高麗朝)에서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고 되어 있는 바, 공(公)이 고려조에서 벼슬을 한 때는 대략 다음과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즉 1231년(고종 18)부터 30년간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고종 19년 개경(開京)에서 강화(江華)로 천도, 항거하다가 1258년 철령(鐵嶺) 이북의 12성(城)을, 1270년(원종 11)에는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몽고에 할양하여 국토는 축소되고, 후일에 충렬왕이 된 세자 전을 몽고의 압력으로 연경(燕京)에 보내 천장공주(天長公主)와 결혼시킨 후 강화로 천도한지 39년만에 환도하게 된다. 공은 몽고의 압제하에서 고려 관제가 격하되어 삼성(三省) 즉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이 첨의부(僉議府)로 통합·개편되면서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가 되어 민생을 살피는데 진력하였다. 묘소의 소재는 확실하지 않은데 1901년(조선 고종 38) 양경공파(良敬公派)의 준식(俊植) 등이 옛날 묘소가 있었다는 함남 영흥군 서면 은곡동에 제단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받들었다고 하나 남북이 갈린 후에는 그 소식도 모른다. 1990년 양주시 백석면 연곡리 지령산 아래, 5세 충무공(忠武公) 영무(英茂)의 부조묘(不조廟)인 휴암묘(休巖廟) 옆에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인 영무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제단(祭壇)을 쌓고 비(碑)를 세웠다. 단비명(壇碑銘)은 성균관 부관장 고부(古阜) 이수원(李壽源)이 짓고 한국서예협회 학술이사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아울러 2세조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인재(麟才), 3세조 참찬문하부사공(參贊門下府事公) 순후(珣厚), 4세조 한산백공(漢山伯公) 세진(世珍)의 단비(壇碑)도 시조공(始祖公)의 단소(壇所) 앞에 나란히 세우고 해마다 10월 초하루에 향화(香火)를 올리고 있다. 배위(配位)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고 판도판서공 인재(麟才)와 총관공 휘(暉) 형제를 두었다.

〔영흥 시조단비(始祖壇碑)〕

공(公)의 성은 조씨이고 이름은 지자수자(之字壽字)이고 벼슬은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내셨다. 세계(世系)는 한양에서 나왔으니 곧 우리 조씨의 시조이시다.
후세에 자손이 많이 번성하고 훌륭하게 빛나 큰 어진이, 큰 선비, 이름난 사대부(士大夫), 충효, 문장이 발자취를 잇대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니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공의 무성한 덕의 남은 은혜이다.
공의 그 무성한 덕으로서 마땅히 백세의 향화(香火)를 받아야 할 것이며 자손이 많음으로서 한 언덕으로 묘소가 남아 있어야 할 것인데 아 ! 묘소를 실전(失傳)한 것이 어느 대(代)였는지 알 수 없구나.
보첩(譜諜)을 상고해 보면 묘소는 영흥군 서면 은곡동이라 하였음으로 자손들이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사는 이에게 물어본 즉 전하는 말에, 비록 조씨의 선산(先山)이라고 하나 증거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두루 산기슭을 살폈으나 선묘(先墓)를 찾아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무궁하게 원한과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준식(俊植)은 종제(從弟) 훈식(薰植), 족질(族姪) 종긍(鍾肯)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남들도 실묘(失墓)한 이는 단(壇)을 베풀고 향사하는 이가 한 둘이 아니고 나라에서도 또한 이 법을 행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祖先)의 일도 그렇게 행해야 할 것이나 다만 재물을 구할 방법이 없다.」「좋은 말씀입니다. 만약 종족에서 거두기만 하면 어찌 재물이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자네는 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무릇 일이란 처음에 꾀하기는 쉬워도 결과를 잘 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지금 이 일은 방법을 연구하여 시작하기 어려움이 끝을 잘 마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어째서 그렇습니까 ?」「대개 사람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의심하다가 다 이루어진 후에 믿는 것이니 그런데 누가 처음 시작할 때에 의심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함께하여 끝을 잘 마치려 하겠는가 ?」 「조상의 일을 자손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진실로 양심이 있는 자라면 무엇을 의심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있으리오 ?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하지 않았는가 ? 그러니 하늘은 반드시 우리 조상으로 하여금 영구히 향화를 끊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세 사람은 기일을 정하여 출발하였다.
재물을 동도(東道)에서부터 모으면서 북관(北關)까지 이르렀는데 제족(諸族)이 모두 메아리에 응하듯 하였다. 본읍(本邑)을 지나 수백리의 험한 산골을 빙빙 돌다가 은곡동에 닿았으나 물어보려 하여도 사람이 없고 사람이 있어 물어도 그 일을 아는 이 없었다.
산골을 헤메는 동안에 또 전에도 조씨의 산을 찾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도 보았으나 매우 모호하였다.
아 ! 공의 덕이 무성함과 자손의 많음으로써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저 푸른 하늘이여, 어느 때나 우리 선묘를 봉심(奉審)하여 봉분도 쌓고 제사도 지내서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황폐한 묘를 면할 수 있으리오 ? 마지 못하여 땅을 골라 단(壇)을 쌓고 날을 가려 비(碑)를 세웠으니 출발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무릇 1주년이 되었다.
신축년(辛丑年), 서기 1901년 후손(後孫) 진사(進士) 준식(俊植) 삼가 지음.

* 준식(1848~1915)은 양경공-병참공-문간공의 9세손으로 생부(生父)는 호조참판을 지낸 제화(濟華)이고 제영(濟英)에 입양(入養)되었음. 훈식(1864~?)은 문묘직원(文廟直員)을 지냈고 종긍(1853~1912)은 문간공의 조카인 송천공파(松泉公派)로 자는 공헌(公憲), 호는 한좌(漢左)임.

양주 시조단비(始祖壇碑)〕

1901년 후손 준식 등이 영흥에 시조단비를 세웠으나 남북이 분단된 후로 남한에 사는 후손들은 추모의 정성을 다하고 싶어도 향사(享祀)를 받들고 참배(參拜)할 곳이 없으므로 1988년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이며 길상지(吉祥地)인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지령산 기슭에 제단을 모시기로 판도공파종회에서 종의(宗議)가 합일되었다. 제단을 이미 영흥에 만든 뒤에 또 만들어도 되는지 말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옛말에 신명(神明)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고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임을 어찌하랴.
이에 시조공의 25세 주손(嫡長孫) 용은(容殷)과 후손 태수(泰秀), 병덕(柄德), 창동(昌東), 태훈(泰勳)이 주선하고 충무공의 먼 외손(外裔)인 성균관 부관장 고부(古阜) 이수원(李壽源)이 비문을 짓고 한국서예협회 학술이사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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